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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독서(비문학) 교재 맛있게 배껴쓰기

수능단기특강 국어영역 독서 고단백 (천재교육)

2025년 3월 17일 월요일 #7  

 

비교와 대조 02

 

(예술) 다게레오타이프와 칼로타이프

 

프랑수와 아라고는 1839년 7월 3일, 프랑스 하원에서 다게레오타이프의 특허권을 국가가 매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보고서를 낭독하였다. 다게레오타이프는 1839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가 발명한 초기의 사진 처리 과정의 한 방식이다. 아라고는 보고 내용에서 다게레오타이프가 미술의 영역에서 천문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기여할 공로를 예측하였고, 마무리 부분에서는 노출 시간과 관련한 기술적 한계를 다게르가 극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다게르가 사진을 발명할 당시, 일반적인 조건에서 인물의 초상을 찍기 위해서는 모델이 십여 분 이상 부동자세로 있어야만 했다. 감광 물질인 요오드화은을 입힌 판에 대상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사진을 쵤영하였는데, 상이 맺힐 때까지 충분히 긴 시간 동안 빛을 쏘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초기의 다게레오타이프는 근대 회화에서 풍경화와 정물화에 해당하는 작품을 생산하는데 한정되었다.

 

1841년을 전후로 다게레오타이프는 순간포착이 어렵다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 두가지 방향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첫째는 광학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으로, 빛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이미지를 보다 선명하게 담을 수 있는 단초점렌즈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요오드화은 대신 염화 요오드를 사용하여 감광판의 감도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개선이 결합하자 필요한 노출 시간은 2~3분대로 단축되었고 이미지의 선명도도 향상되었다. 그 결과 다게레오타이프는 이제 풍경과 정물뿐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대상의 세부적인 모습들도 복제하듯이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다게르가 발명한 사진 공정은 외부로부터 존재하는 현실을 광학과 화학의 작용에 의해 기계적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이미지를 복제하기 위해서는 다시 전통적인 판화 기법에 의존해야 했다. 단 한장뿐인 양화 원판을 음각 판화로 만든 후, 잉크를 묻혀 찍는 방식으로 복제해야 했기 떄문이다. 따라서 그 결과물은 광학과 화학에 의거한 사진이 아닌 판화에 불과했다. 당시의 대중 산업 사회는 광화학적 방식으로 복제한 현실의 이미지를 또 다시 광화학적 방식으로 무한히 복제하고자 하였으므로 프랑스 정부가 전대미문의 발명으로 공표했던 다게레오타이프는 짧은 운명을 비켜갈 수 없었다.

 

반면에 다게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탤벗은 칼로타이프라는 공정을 발명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최초의 상업적 사진집인 <자연의 연필>을 출간하였다. 칼로타이프의 공정은 다음과 같다. 투명도가 높은 종이에 질산은 용액과 요오드화칼륨 용액을 적셔 표면에 요오드화은이 형성되게 한 후 다시 질산은-갈산 혼합액을 바르면 빛에 빈감하게 반응하는 상태가 된다. 이 종이를 카메라에 넣고 빛에 노출시켜 상이 맺히게 한 후, 다시 질산은-갈산 혼합액에 담가 이미지를 현상한다. 티오황산나트륨 용액에 담가 이미지를 정착시키면 투명한 음화 원판인 네거티브가 되며, 네거티브에 염화은을 입힌 용지를 겹쳐 빛을 쏘이면 용지에 사진이 인화된다. 칼로타이프는 원판이 되는 종이의 섬유질 때문에 동시대의 다게레오타이프에 비해 화질이 떨어진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나 비용이 저렴하다는 점과 광화학적 방식을 거쳐 한 장의 네거티브로 여러 장의 사진을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다.

 

탤벗은 칼로타이프의 탁월한 유용성과 복제성을 홍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미학적 가치까지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는 칼로타이프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를 거울처럼 낱낱이 비추는 다게레오타이프보다 훨씬 아름답게 현실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의 비평가 애논은  <자연의 연필>에 실린 사진에 대해 "모든 것이 부분들의 조화 속에서 제시되었고, 그 조화로움은 세부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묘사할 때 진실의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준다."라고 평하며 칼로타이프의 예술성을 치켜세웠다.